고 박명조 화가
대한민국 미술의 거장 우현(又玄) 박명조 화가는 대구 출신 화가로 1926년 제5회 조선미전(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에 처음 입선하고 그해 9월 대구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중앙에 진출한 첫 서양화가다.

대구서양화단의 선구자로 대구미술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박 화가는 1906년 대구 덕산동 104번지의 초가집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치던 박성문(朴聖文)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큰아버지 밑에서 엄하고도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대구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재학 당시 미술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17세에 대구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자퇴한 그는 1926년, 20세에 ‘초춘’으로 제5회 조선미전에 당당히 입선했다.

그해 9월 ‘박명조 개인전’을 교남기독청년회관에서 수채화 작품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림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당시 동경에서 명성이 높았던 석정백정(石井栢亭)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1년 만에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해 대구 근교인 월배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다시 그림에 열중했다.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 미술인그룹인 ‘아까쯔찌회’土會와 ‘대구미술협회’에 반발해 서동진, 최화수, 배명학과 함께 ‘영과회(零科會)’에 참여했고 이들에 이인성과 김용조가 다시 합류해 1930년 ‘향토회(鄕土會)’를 결성, 한국미술인들의 결속과 미술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향토회는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끼리 결속돼 일제에 대항한 민족적인 조직으로서의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는 주경의 회고에서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향토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은 조선미전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뒀으며 대구미술의 기반을 굳혔고 발전할 수 있는 전초지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조선미전에 참가한 작가의 숫자나 발표 횟수, 작품의 질적 면에서 지역적인 카테고리를 벗어나 한국근대미술사의 1930년대를 논함에 있어 비중 있게 다뤄야 할 그룹이었다.

그의 활동무대는 제5회 조선미전 첫 입선 이후 7·10·11·12·13·14회 연속 입선한 조선미전과 대구의 미술그룹인 ‘향토회’였다.

그가 그린 거의 모든 작품은 수채화의 전통적 기법과 빈틈없는 구도를 가진 것들이다.

대구를 수채화의 본산지로 특징짓는 데에는 서동진과 더불어 온전히 그의 공로가 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와 동시대 작가들과 같이 자연주의적 경향에 머물고 있는 것은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기엔 수채화의 한계성이 있다는 것과 담백한 색채로 자연을 재현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채화가 갖는 재료와 붓질의 특성을 최대로 살려 형태를 간결하게 파악하고 의미를 함축하며, 새로운 시각과 신선한 표현방법에서 찾아질 수 있다.

1930년대 작품인 ‘노란 장미’는 나뭇잎과 어두운 녹청색의 배경이 묘한 뉘앙스를 이루며 간결한 노란 장미꽃을 환하게 떠 올리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혼란의 시기에 담담한 심경으로 그린 1956년 작품인 ‘해인사’에서는 잡다한 것이 정리되고 투명한 색채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제14회 조선미전 이후 공모전 출품을 중단했고 공식적인 단체전의 마지막 출품은 1937년에 개최된 남조선미술전람회였다.

이 무렵부터 작품 활동이 중단된 이유는 뚜렷이 밝혀진 바는 없지만 마지막 조선미전 출품 때인 제14회에 2년간 그의 가르침을 받던 6년 후배인 이인성이 ‘경주의 산곡에서’로 조선미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추천작가로 추대된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추측도 있다.

대구 미술인으로 최초 조선미전의 입선작가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했던 박명조 화가는 성격이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소탈해 남 앞에 나서고 공명심을 욕심내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6년 선배인 서동진의 활동성과 6년 후배인 이인성의 천재성에 그의 과묵은 침묵으로 바뀌어버렸다.

대륜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정원 가꾸기에 남다른 취미를 가졌던 그는 평범한 교사로서, 일상인으로서 그림을 사랑하며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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