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공업의 첫 출발은 1959년 금성사(지금의 LG전자)의 라디오 생산이었다. 플라스틱 제조로 돈을 번 락희화학(LG화학) 구인회 회장이 세운 금성합성수지공업사를 개명하고 서독인 기술자를 초빙, 1959년 첫 제품을 출시했다. 그러나 성능이 미국산보다 못해 잘 팔리지 않았다. 미군 PX에서 밀반출된 월 1만2천 대 가량의 라디오가 시장을 장악했다. 재고 증가, 적자누적으로 회사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던 금성사는 뜻밖의 정부시책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5·16 군사정부가 미군 PX 물품 밀반출의 강력한 단속과 함께 정부시책을 농촌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판매 대수가 몇천 대에 불과하던 국산 라디오가 13만여 대로 급증했다. 두 번째 발걸음인 전화 교환기 국산화에 이어 1960년대 중반 흑백 TV가 새 국산화 품목으로 등장했다.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제휴한 금성사는 1966년 19인치 진공관 TV를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민간업체 주도로 전자제품 국산화가 본격화하자 박정희 정부도 발 벗고 전자공업 육성에 나섰다. 전자공업이 조립에 손작업이 필요한 노동집약 산업으로 우리 여건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자공업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삼성 이병철 회장은 1983년 고희를 넘긴 73세에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산업은 반도체”라면서 반도체산업에 올인 했다.

“석탄 1t은 40달러, 철 1t은 340달러, 알루미늄 1t은 3400달러, TV를 중량으로 계산하면 1t에 2만1300달러, 반도체는 1t에 85억 달러인데 뭘 해야 될 건지 분명하지 않느냐” 시대와 산업의 흐름을 꿰뚫어 본 이병철 회장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판단이다.

달리는 천리마 ‘삼성전자’에 채찍을 가한 사람은 아들 이건희 회장이다. “삼성은 이제 양(量)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質) 위주로 철저하게 변해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선언’은 반도체 맹주 삼성전자 도약의 발판이 됐다. 삼성전자의 2분기 매출이 60조 원으로 애플을 제치고 전 세계 제조업체 중 1위에 올랐다. 정말 자랑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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