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쳤으니 여생은 산수와 함께 보내리

읍호정 안에는 정온의 읍호정기 윤두수의 시 이황차운시 등이 걸려 있다.
어지러운 세상의 약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사람,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정탁의 자취는 예천읍 고평리 정충사(靖忠祠)와 도정서원(道正書院), 읍호정에 남아 있지만, 후손들이 세운 정충사나 도정서원과는 달리 정탁이 벼슬을 마친 뒤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직접 세운 읍호정에는 그와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읍호정은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금모래가 아름다운 내성천 동호언덕에 있다. 정탁 사후 그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도정서원 옆에 있다. 우거진 숲이 끝나는 곳,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시위하듯 서 있는 강 언덕에 읍호정이 있다.

읍호정편액. 강호를 품는다는 뜻이다.
읍호정은 정탁이 76세가 되던 1601년 (선조34) 좌의정을 끝으로 43년의 관료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지은 정자다. 그는 물에 접해 있는 고평리에 집을 짓고 ‘망호정(望湖亭)’이라 이름하고 건너편 동호 언덕에 읍호정을 지어 들고 날며 승경을 즐겼다. ‘읍호’는 ‘강호를 뜬다, 품는다’는 뜻이다. 세상에 나아가 역할을 마친 정탁이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꿈을 담은 편액이름이다. 읍호정에는 윤두수의 시 ‘한강송정상남행(漢江送鄭相南行)’과 이황의 차운시, 신익성 김응조의 차운시 등 시판이 걸려있고 1635년 동계 정온이 쓴 기문 등이 걸려 있다. 정탁 자신의 시 ‘우회(寓懷)/ 회포를 부치다’는 벼슬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읍호정에서 쓴 시다.

책을 읽음에 늘 세상을 구제하리라 마음먹었는데(讀書常擬濟時艱)
풍진 속에서 돌아다닌 세월 몇 해이던가(奔走紅塵幾暑寒)
칠 년의 왜란 속에 하나의 계책도 내지 못하고(寇亂七年無一策)
백발에 비로소 고향 돌아옴이 도리어 부끄럽네(還

白髮始歸山)

읍호정은 한 폭의 산수화다. 도정서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숲이 우거진 길을 걸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언덕 아래 강이 길게 펼쳐지고 강너머 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길의 왼쪽으로 녹음 청청한 산 언덕이다. 이름 모를 새 소리가 산사의 목탁소리 같다. 정신이 맑아지고 숨이 깊어진다. 산은 고요하고 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읍호정 가는 산길에서는 그 반대다. 물은 정물인데 반해 산이 활발하다.

읍호정에서 본 내성천
정탁은 여기서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회포를 풀기도 하고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시골농부들은 그가 재상을 지낸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소탈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 일화 하나. 해 질 무렵이 되도록 정탁은 내성천에서 배를 타고 낚시에 몰입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시골 촌로였다. 그때 의관을 잘 차려입은 젊은 양반이 큰 소리로 정탁을 불렀다. “늙은이, 강 건너에 약포가 사신다는데 맞는가?” “그렇다고 합니다만.” “내가 약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나를 업어 배를 좀 태워 주게.” 정탁은 태연히 젊은 양반을 등에 업고 배에 태워 강을 건넜다. 그때 양반이 다시 물었다. “요새 약포는 어떻게 지내신다든가?” “네, 약포는 요새 낚시를 즐기다가 길손도 업어 물을 건네준다고 합니다.” 젊은 양반이 깜짝 놀라 사죄했다.

정탁은 공식적인 자리나 행차가 있을 때는 견와라는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의 문집인 ‘약포집’ 연보는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 이후로 소요부(邵堯夫)가 행와(行窩)를 만든 고사를 모방해서 견여를 만들었는데 매우 가볍고 편했다”라고 적고 있다. 송대 학자인 소강절이 낙양에 ‘안락와’라는 작은 집을 지은 뒤 외출할 때는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는데 ‘행와’라고 했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움집’이라는 뜻이다.

읍호정은 좌의정을 지낸 약포 정탁이 43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다.
정탁은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위기 때 재상을 지냈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청복과 열복, 천수를 누린 축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17살 때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익혔고 진주교수로 부임했던 36살에는 이황과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루던 남명 조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는 조식에게서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서 있는 듯한 기상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식은 정탁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가는 길에 집에 있는 소를 끌고 가라고 했다. 의아해하는 정탁에게 ‘말과 의기가 너무 날카로워 둔한 소를 가져가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좌의정까지 오르며 열복을 누린 정탁이 고향에서 퇴후지지를 보내며 청복을 누린 것은 조식의 이 말을 가슴에 새겼기 때문이다.

정탁은 ‘약포, 약초를 심은 밭’이라는 그의 호처럼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약과 같은 존재였다. 위기에 빠진 역사적 인물 세 사람을 구명했다. 이순신과 김덕령, 두사충이 그들이다. 정유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이것이 왜적의 계략이라고 보고 출정하지 않았다. 서인들이 벌떼 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윤두수가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무시했다며 처형하려고 했다. 이때 정탁이 나섰다. 그의 나이 72살이었다. 그는 우의정을 지내고 지중추부사로 있었다. 감기에 걸려 병석에서 목숨을 건 상소문을 올렸다.

읍호정 앞에는 수백년된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고 정자 아래에는 내성천 푸른 물이 흐르고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은 상소문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다. “이순신은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중략)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하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지도 생각하지 않고 구간의 자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힘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유성룡과 이원익이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이순신은 옥에 갇힌 지 28일 만에 백의종군에 나서게 된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발탁했다면 정탁은 이순신의 목숨을 구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했다.

임진왜란 당시 윤두수는 이순신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탁은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을 처형해서는 안 된다며 이순신을 방면을 주장했다. 서인과 동인으로 정파가 엇갈렸으나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두터웠던 모양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정탁은 수차례 걸쳐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왕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부모의 산소에 성묘하러 가겠다며 왕의 허락을 받았다. 실제로는 벼슬을 떠나 고향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읍호정에 걸려 있는 윤두수의 시는 그때 한강까지 따라와 송별하며 쓴 시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가 예천으로 낙향하는 정탁을 송별하며 쓴 시.

해마다 동문에 올라 머리를 들어 고향 생각하다가 
서풍 불 땐 부채 들고 생각이 정말 많았지
새고 없어진 밤에 다닌다며 늘 부끄러워했는데
강물은 마르고 한 해가 저무니 다시 혼을 녹이네
예부터 급류에서 물러나기는 한층 어려웠으니
세상사 지금이라고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울타리안 뱁새는 공연히 스스로 대단해 하지만
구름 밖을 나는 홍곡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네

- 윤두수의 시 ‘한강에서 남쪽으로 떠나는 정재상을 송별하며’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이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벌하다가 죽였다. 정탁은 전란 중에 한 명의 인재라고 아껴야 한다며 그가 풀려나게 했다. 김덕령이 이몽학의 역모에 휘말려 다시 체포되자 정탁이 결백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김덕령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죽었다. 두사충은 명나라 이여송을 따라 참전한 풍수전략가였다. 임진강 벽제관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대패를 한다. 이여송을 패전의 책임을 진지 위치를 잡은 두사충에서 물어 참수형을 명령했다. 이번에도 정탁이 나섰다.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해 두사충을 살렸다. 두사충은 이후 조선에 귀화해 당대 최고의 풍수로 명성을 떨쳤으며 두릉두씨의 시조가 됐다.
김동완 여행작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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