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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87. 안동 체화정(棣華亭)

길가에 지어 형님벗과 어울리기 좋으니 명산절경 부럽잖네

김동완 여행작가   |   등록일 2017.1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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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화정은 이민적이 지은 정자로 맏형 이민정과의 아름다운 우애를 나눈 곳이다.
1786년 5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 ~ 미상)는 2년 남짓한 안기찰방 근무를 마치고 도화서로 복귀한다. 안기 찰방은 안기역을 중심으로 하는 11개 역과 역도를 담당하는 종6품 관리. 안기역은 현재의 안동 안기동에 있었다. 찰방은 역장이나 우체국장쯤 되는 벼슬이지만 주로 대간이나 정랑직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이 맡아 수령의 탐학을 보고 하는 감찰 역할도 맡는 비중 있는 자리였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이를 두고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김홍도를 아꼈던 정조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원 김홍도가 안기찰방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중 체화정에 들러 쓴 담락재 현판
김홍도는 도화선 복귀를 준비하면서 이천동에 있는 커다란 암벽에 전임 관찰사인 김상철과 이병모의 ‘영세불망비’를 조성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체화정에 들러 ‘담락재(湛樂齋)’라는 현판 글씨를 썼다. 체화정은 만포(晩圃) 이민적(李敏迪·1702~1763)이 맏형인 옥봉(玉峯)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우애를 나누며 여생을 보낸 정자다. 1761년(영조 37)에 지었다.


‘담락’은 시경‘소아’의‘상체지화(常棣之華)’에 나오는 시구다. ‘화락차담(和樂且湛 / 화합해야만 즐겁고 기쁠 수 있다)에서 빌렸다. 김홍도가 이민적 사후 23년 뒤에 현판글씨를 쓴 것처럼 이민적 이민정 형제의 우애는 동시대 선비들의 마음도 끌었다. 18세기 영남의 거유로 꼽히는 대산 이상정은 이민적의 시 ‘체화정’을 차운해 시를 남겼다.


정자와 누대 짓는 것도 전날을 인연하니
뉘 말하랴 거친 언덕에 홀연히 지었다고
십 리 자욱한 안개 속에 냇물은 아득하고
집집마다 울려퍼지는 다듬이 소리에 달빛은 어여뻐라
낚시 파한 물가에서 차를 마시고
바둑 마친 저녁 언덕 백로 함께 잠드네
뜨락엔 한 떨기 상체나무 있으니
동풍에 그 뜻을 알아 세월을 보내네

- 이상정의 시 ‘이혜숙 민적의 체화정시에 차운하다’


조선 중기의 문인 소세양(蘇世讓)은 “산과 물은 천지간의 무정한 물건이므로 반드시 사람을 만나 드러나게 된다. 산음의 난정이나 황주의 적벽도 왕희지나 소동파의 붓이 없었더라면 한산하고 적막한 물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민적과 이민정 형제애와 체화정의 아름다움은 김홍도와 이상정을 만나 그림과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념비가 됐다.
정자에서 본 연못과 삼신산
체화정 앞 연못. 연못속 세개의 섬은 삼신산을 상징한다.
체화정은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있는 정자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기둥을 똑같은 간격으로 배치한 뒤 3칸 마루를 들이고, 뒤쪽에 온돌방 1칸을 뒀다. 좌우 옆칸에 마루방을 놓은 독특한 간잡이법을 보인다.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러 정자 앞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면서 정취를 즐기도록 했다. 연못은 사각형으로 팠고 연못 안에는 둥근 섬 3개를 조성했다. 방지원도형인데 3개의 섬을 만들어 눈길을 끌고 있다. 3개의 섬은 방장 봉래 영주를 상징하는 삼신산이다. 삼신산에는 불로초가 자라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인이 살고 있으며 초목과 금수는 모두 흰색인데 황금과 백은으로 지은 궁궐이 있는 곳이다. 조선의 선비가 선계의 판타지를 정자에 입힌 것이 이색적이다.


이민적의 본관은 예안이며 자는 혜숙(惠叔)이다.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을 닦는데 열중했다. 이민적의 생몰년을 놓고 1663년~1744년이라는 설이 있으나 후손 이대교씨(73·서울 거주)는 예안이씨 족보를 근거로 1702~1763년이라고 주장 한다. 신협이 쓴 ‘체화정 중수기’에도 ‘숙종 때의 고 성균관 예안 이민적공’이라고 명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 재위때 태어나서 영조 재위 때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1744년 (영조 20)에 생원에 합격했고 죽기 2년 전에 체화정을 지었다.

체화정 정명은 시경의 상체지화에서 따왔다. 형제간 우애를 뜻한다.
이민적은 체화정에서 큰형인 이민정을 아버지 섬기듯이 모시며 살았다. 정자 이름 ‘체화’ 역시 《시경》〈소아〉‘상체지화’에서 따왔다. “아가위 꽃 / 꽃받침 드러나 보이지 않겠는가 /사람 중에 형제 만한 사람 없다네/죽음의 두려움에 형제가 서로 대단히 생각한다/들판과 습지에 사로잡히면 /형제는 서로 찾아간다네”라는 싯구에서 가져왔다.


상체지화는 아가위나무의 꽃이다. 형제 간의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체화정 편액은 사도세자의 스승인 유정원(柳正源)이 썼다. 유정원의 호가 삼산(三山)인데 삼산은 삼신산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므로 체화정 앞 연못에 조성된 삼신산과 어떤 연관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정자 앞 좌우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붉은 꽃을 피워내고 연못에는 잎이 작은 연꽃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정자 뒤에는 산죽이 무성하다. 정자 안에는 유정원의 ‘체화정’ 편액과 김홍도가 쓴 ‘담락재’ 현판, 이상진이 쓴 ‘체화정기’ 신협의 ‘체화정중수기’ 체화정 원운 등이 걸려있다.

이상진이 쓴 체화정기
체화정은 풍산읍의 큰 길가에 세워졌다. 이 때문에 지역 선비들 간에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체화정기’에 이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옛날부터 정자를 지음에 반드시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을 선택하거늘 이 정자는 신작로 옆에 있다.(중략) 주자는 일찍이 시랑 전자진의 새 주거지가 성에 가까이 있어 사람을 보내고 맞는 장소가 된데 대해 편지를 보내 간곡하게 경계하였다. 이혜숙의 정자는 주자의 금함을 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상진이 해명을 한다. “정자를 체화라 한 것은 경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네. 이혜숙의 백형이 손님을 좋아하고 벗을 좋아하여 이혜숙이 이 정자를 세우자 백형이 매우 좋아했다. 아침 저녁 마다 정자에 거처하니 빈객이 찾아왔다네. 만약 이 정자가 궁벽한 산골에 있다면 경치는 선택할 수 있을 것이나 친한 친구들의 모임이 반드시 오늘 같지 않을 것이다. 정자 이름의 뜻에 어긋나지 않겠는가.”형이 친구와 손님 맞는 것을 좋아하므로 깊은 산속이 아니라 사람이 왕래하기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형과 함께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만년을 보냈다.

늙을수록 나는 속세 인연 끊고 싶어
물을 끌어 오고 바위에 기대어 몇 기둥을 얽었네
고요한 빈터 연기 나무에 갇히어 푸른빛 띠고
차가운 밤 달빛은 주렴에 들어 아름답네
동북쪽의 창가에선 산을 보고 읊조리고
일상의 베갯머리 여울 소리 들으며 잠자네
일찍이 그간의 많은 취미 아노니
이십여 년이나 헛되이 달리려고 했네

- 이민적의 시 ‘체화정’

체화정의 두 번 째 주인은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 1719~1793)다. 이민정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결혼한 뒤에도 내실에 거처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즐기므로 날마다 5리 길이나 떨어진 큰 강에 나가 고기를 잡아왔다. 하루는 깜깜한 밤에 그물을 쳐놓고 나오니 호랑이가 나타났다. 모래에 몸을 가리고 숨을 죽이고 있자니 호랑이가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그냥 사라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병 져 누운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꿩을 어디서 구할까 궁리 중인데 마침 꿩이 집으로 날아와 채마밭에 떨어졌다. 그 꿩을 잡아 어머니의 입맛을 되찾아 줬다. 사람들은 이한오의 효성에 금수들이 감복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이한오의 효성을 높이 산 순조가 정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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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체화정 길 건너 동네인 하리에는 그의 8대조부 풍은공 이홍인의 종택 충효당이 있고 충효당안에는 별당인 쌍수당이 있다. 쌍수당은 이홍인의 충의와 이한오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홍인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했다. 체화정은 우애와 효성, 충의가 예안 이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이며 세 덕목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당당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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