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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97. 청송 침류정·오월헌·동와정

춤추는 갈대 사이로 속삭이는 바람소리에 ‘詩心’이 절로

김동완 여행작가   |   등록일 2017.12.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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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면 여암마을 길안천에서 있는 침류정(왼쪽) 오월헌(가운데) 동와정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여암마을 앞을 지나는 길안천은 갈대가 주인이다. 강 속의 물은 흔적만 남긴 채 빠져나갔고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누렇게 갈대가 자리를 잡아 바람이 불 때 마다바람보다 먼저 눕거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고 있었다. 바람이 서쪽에서 우루루 몰려오면 바람이 속삭이는 지, 갈대가 수군거리는 지 규정하기 어려운 소리의 무리가 우루루 길안천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갔다. 초겨울 현서면 여암마을 앞 길안천에는 물 대신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갈대밭 너머 계곡 건너편 고모산 아래 언덕에 서 있는 세 채의 정자가 침류정, 오월헌, 동와정이다. 침류정과 오월헌은 인접해 있고 동와정은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다. 침류정은 김성진이 임진왜란 이후 지은 정자다. 그는 의성 김씨 청송입향조 김한경의 증손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은 모두 의병활동에 참여시킨 뒤 자신은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다녀왔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장성해서는 학식이 높고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침류정에서본 오월헌
김한경(1456~1552)은 풍덕군 출생으로, 1506년(중종 1)에 정국공신에 오르고 지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으나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김한경은 약 500년전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하여 현서면 도리에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가 됐다. 김한경의 호가 도곡인데 그의 호를 따서 도리, 도동이라고 불렀다. 도동의 뿌리가 되는 마을을 원도동(元道洞)이라 부르기도 한다.김한경이 이곳에 입향하여 개척하였던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과 제자들이 재사(齋舍)를 지었다. 추원당이다. 이 마을 이름을 재궁(齋宮)이라 하였고, 이 지역을 재궁곡, 재궁골, 쟁굴이라 하였고 지금은 재리(才里)로 부르고 있다.

침류정현판. 흐르는 물을 베개삼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안빈낙도의 의미다.
침류정은 ‘침류수석(枕流漱石)’에서 나왔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라는 뜻이다. 본래는 ‘돌을 베개 삼고 물로 양치질을 하련다’라는 뜻의 ‘침석수류’인데 진나라의 손초라는 사람이 친구 왕계에 ‘침류수석’이라고 잘못 말을 하면서 비롯됐다. 왕제가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자존심 강한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 함이요, 돌로 양치질 하는 것은 치아를 갈아서 닦기 위함이다”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침류수석’은 잘못을 엉뚱한 논리로 정당화하려는 궤변을 빗대는 말로도 쓰인다.

침류정은 김성조가 임진왜란 이후 후학을 양성하고 지은 정자다.
침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구조다. 뒤쪽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는 마루를 깔았다. 문 앞에는 길고 좁은 쪽마루를 달아 출입하게 했다. 자연석 초석 위에 온돌방을 올리고 네 귀의 기둥은 네모기둥을, 나머지 기둥은 모두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누각형태로 지었다. 정자에 올라 갈대 누렇게 뒤덮은 길안천을 내려보니 강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온다. 앞쪽 저 멀리 어봉산이, 옆으로는 대정산과 문봉산이 눈에 들어온다.

한산 이병하는 기문에서 “ 대개 물 흐름의 발원처를 보면 술잔에 넘치는 물에 불과하여도 천리를 흘러 바다로 가는 동안 많은 논밭에 많은 이익을 주었고 명문이 자리 잡아 살면서 수백 가문의 현인과 선비들이 좋은 곳을 택하여 정자를 지은 것이 왕왕 바둑판에 바둑돌이 놓인 듯한데 지금 이곳은 회수의 동백산 같이 풍수의 엉킨 형세가 석인이 은거하면서 도의를 행하기 적당한 곳이니 이 정자를 지은 까닭이다. (중략) “흐르는 물이 바다에 이르도록 오염되지 아니한다.”하니 흐르는 물이 멀수록 바야흐로 흐려짐이 이 같으니 사람이 물을 맑게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도다. 이 정자에 올라 그 이름을 돌아보고 생각하면 침류의 이름이 마땅하도다. “라고 썼다.

의성김씨 문중의 서당인 오월헌
침류정과 인접한 오월헌은 침류정의 주인 김성진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서당으로 쓰던 건물이다. ‘오월’은 ‘오동나무에 걸린 달’이다. 정자 앞에 강이 흐르고 마당에 서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 있는 풍경을 보며 시를 읊는 선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내 마음을 달에게 내비치며 밤늦도록 완월하는 조선 선비의 서정을 현판에 담았다. 오동나무는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소리를 품고 있는 거문고를, 달은 천년을 이즈러져도 본질이 변함없는 선비의 지조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노래를 품고 있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질이 그대로이고

버들가지는 백 번을 잘라내도 새 가지가 다시 난다

오월헌 앞에 서 있는 350년된 향나무
오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우에 방이 있는데 오른쪽 방에는 강학재(講學齋), 왼쪽 방에는 돈의재(敦誼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기문은 쌍호거사(雙湖居士) 권별(權)이 썼다. “봄과 여름에는 오동나무 그늘이 두텁고 밝은 달빛이 경치를 빛나게 하고, 가을과 겨울이면 오동나무 그림자가 소소하고 서리가 내리는 밤이면 달빛이 밝게 어리니, 이는 조상들의 달빛이 후손에게 비추는 것이며 오동나무가 혹 시들거나 바람에 부러져도 반드시 그 뿌리에서 싹이 돋아 대대로 가꿀 것이다. 저 땅의 오동나무는 자손의 무성함과 연관하고 저 하늘의 달은 조상의 빛을 띠었다”고 썼다. 오월헌 앞에는 오동나무 대신 350년 된 향나무가 우뚝 서 있다. 경상북도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m, 흉고 지름 80㎝가 되는 노거수다.

동와정은 김흥서가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낸 정자다.
가장 동쪽에 있는 정자가 동와정이다. 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을 지낸 동와(東窩) 김흥서(金興瑞)가 세운 정자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자연과 함께 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동와정은 견고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넓으면서도 소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동와정은 6칸 겹집이다. 중간의 2칸은 정당(正堂 : 한 구획 내에 지은 여러 채의 집 가운데 가장 주된 집채)이고, 동쪽의 2칸은 이업소(肄業所 :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며 서쪽 2칸은 연빈소(?賓所 : 손님을 대접하는 곳)다.

동와정의 봄은 백화가 만발하여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무가 그랬듯이 좋은 벗과 더불어 바람 쏘이고 목욕하며 시를 읊고 돌아오기에 좋은 장소이다. 여름에는 구름이 일어나 기이한 자연 경관을 연출했고 가을에는 벼가 무르익은 들판이 펼쳐져서 풍성했다. 이 아름다운 정자도 세월이 흘러 무너지고 부서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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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손들은 북쪽 산의 재목을 베고 남쪽 시내의 돌을 옮겨와 동와정을 재실로 중건하였다.

동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와정은 강이나 계곡에 위치한 강계연변형(江溪沿邊形)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마루는 누마루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정기는 후손 김동섭(金東燮)이 썼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고 무성한 그늘을 땅에 드리운다. 여름에는 구름이 일어나 기이한 봉우리를 만든다. 가을에는 물이 맑고 저녁노을은 따오기와 함께 날며 벼가 무르익어 많은 이들을 살게 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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