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포항제철 신화' 창조…'잘 사는 나라' 건설 매진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 창립. △1970년 4월 1일 포항1기 종합준공. △1976년 5월 31일 포항2기 종합준공. △1978년 12월 8일 포항3기 종합준공. △1981년 2월 8일 포항4기 종합준공 (조강연산 850만톤 체제) △1987년 5월 7일 광양1기 종합준공. △1988년 7월 12일 광양2기 종합준공. △1990년 12월 4일 광양3기 종합준공. △1992년 10월 2일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조강연산 2100만톤 체제)
1992년 10월 2일. 광양종합운동장에서는 4반세기에 걸친 포항제철의 건설 여정을 마무리하는 종합준공식이 열렸다. 포항 영일만의 모래벌판에서 첫 삽을 뜨기 시작한 후 포항에서 4개의 용광로 준공하고 다시 광양에서 4개의 용광로를 건설해 가동하면서 1968년 창업이래 4반세기에 걸친 제철소건설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처럼 포항제철의 4반세기 역사 종합준공에 대한 의의는 자못 컸다.
포항제철의 지속적인 설비확장과 이에 따른 철강재 공급 확대에 힘입어 국내 철강수요산업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성장할 수 있었다.
‘최대생산, 저가판매 정책’은 국내 자동차, 조선, 전자, 컨테이너 등 수요산업이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만약 포항제철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1991년 기준 연간 2720만 톤에 이르는 철강재를 수입에 의존하게 되어 막대한 외화를 지출해야만 한다.
특히 철강 2100만톤 시대개막은 최적 규모의 경제성실현, 양 제철소 상호보완체제로 효율성 극대화, 고부가가치강 생산기반 확충, 국민경제 발전 촉진이라는 큰 의의를 지녔다. 포항제철소는 고급강위주의 다품종소량생산에 주력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코일 및 냉연코일 위주의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하는 등 각 제철소의 특성에 맞는 제품구성을 기함으로써 인력, 비용 등의 생산원가 절감과 함께 설비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2) 박태준의 임무완수 보고와 퇴진
엄격히 말하면 포항제철 4반세기 대역사의 출발점은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첫 종합제철 사령탑을 맡으라는 特命을 받은 1967년 10월이다. 그래서 1992년 10월 2일이 꼭 25년, 4반세기가 된다.
그래서 박태준은 종합제철의 경영자를 맡은 지 25년 만에 조강생산 2천100만톤 체제를 완공한 후 한지 두루마리 뭉치에 자필 붓글씨로 적은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동작동 박 대통령의 국립묘지를 찾아간 것이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신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박태준 회장은 생전에 박 대통령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한 이 날(1992년 10월 3일)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박정희 대통령 묘소 참배문) <요약>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때는 ‘2,100만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각하! 일찍이 분부하셨고, 또 다짐 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 올림
여당이던 민자당 최고위원을 맡고 있었던 그에게는 3당 통합과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 등 숨 가쁜 정치 격랑기에 정계와 포항제철을 모두 떠나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에게 임무완수 보고를 하고 온 날, 박태준은 민자당 최고위원과 김영삼 대통령 후보 선대위원장, 포항제철 회장 등 모두 3장의 사표를 함께 썼다.
이처럼 1992년 10월 초, 포항제철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창사 이래 가장 큰 태풍이 휘몰아쳤으며 창업 이후 4반세기 동안 외풍을 막아 주었던 박태준이 떠나면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파란만장의 세파를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