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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50년] 21. 포항제철,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다

시련 딛고 지속 경영혁신 '세계1위 철강회사' 저력 과시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   등록일 2018.10.1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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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회장 박태준
반석 위에 지어진 집처럼 태풍 불어도 미동도 않던 포항제철이 격동의 칼바람 앞에 서게 됐다.

1968년 4월 포항제철주식회사 창립 때부터 줄곧 포철의 사령탑을 맡아온 박태준 회장이 1992년 10월, 대한민국 철강 4반세기 대장정을 완성한 후 홀연히 회장직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4년 4개월가량 포항제철은 정치적 외풍으로 롤러코스트를 탔다.

정확히는 1992년 10월 8일, 박태준의 회장직 사퇴 직후부터 그가 유랑 세월을 접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와 육거리 포항시민회관에서 제1호 포항명예시민증을 받으면서 정계에 복귀할 때 까지다.
2대 회장 황경로
김영삼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와 정치적 갈등으로 물러난 박 회장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에 오른 황경로 회장의 임기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3대 회장 정명식
수뢰혐의 등의 이유로 6개월 만에 물러난 황경로 회장을 이어서 3대 회장에 오른 정명식 회장 역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조말수 사장과 함께 고작 1년만에 물러났다.
4대 회장 김만제
김영삼 정권 시절, 박태준 사람으로 여겨진 황경로 회장과 정명식 회장이 중도 하차한 후 처음으로 포스코 외부인사인 김만제 회장이 4대 회장에 취임한다.

김만제 회장은 4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왔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박태준 명예회장의 정계복귀와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시련을 딛고 새로운 도약의 모색

박태준 회장의 퇴진과 함께 창업 1세대가 물러나자 포철은 내외부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창업세대의 동반퇴진과 함께 격변기를 거치면서 포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야 했다.
황경로 제2대 회장, 박득표 제5대 사장 취임.
박태준 회장의 갑작스러운 퇴진으로 회장직에 오른 황경로 회장은 취임 후 조강연산 2100만톤 체제의 조기정착에 전력을 다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 왔지만, 외부의 압박으로 6개월만인 1993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직전에 사임 의사를 밝힌다.
정명식 제3대 회장, 조말수 제6대 사장 취임
또 1993년 3월 포항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와 이사회에서는 황경로 회장 뿐 아니라 박태준 명예회장ㆍ박득표 사장의 사의를 받아들이고, 정명식 부회장을 제3대 회장으로, 조말수 부사장을 제6대 사장으로 각각 선임한다. 이날 이대공 부사장, 차동해 감사 등도 포항제철을 떠난다. 이른바 이포, 차포등 ‘5포’의 동반퇴장이다.

이로써 4반세기 건설역사를 마무리 지은 시점에서 창업과 성장을 담당하던 창업세대는 새 경영진에게 바통을 넘기고 물러났다

정명식 회장은 취임사에서 “전임직원의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변화의 시대에 맞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바로 1년만인 1994년에도 최고경영층의 변화는 이어졌다.
김만제 제 4대 회장 취임식
1994년 3월 8일 열린 제26기 정기주총에서 창립 이후 외부인사로서는 처음으로 김만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제4대 회장으로 선임하고 이틀 후인 3월 10일 임시이사회에서 김종진 부사장을 제7대 사장으로 선임한다.
떠나는 정명식 회장과 새로 선임된 김만제 회장(뒤에는 당시 출입기자였던 필자)
3월 8일 본사회의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김만제 회장은 “격변의 상황 속에서도 회사는 그동안 높은 신용도와 효율적인 경영으로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해왔으며, 이러한 역량을 총결집하여 그동안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이동통신사업 등을 통하여 도약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공교롭게도 포항제철에 거센 외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한 1992년부터 국내 경제환경도 좋지 않아 수출실적이 저조하고 설비투자 부진이 지속되면서 포철은 조직 슬림화와 구조조정, 임금동결 등 감량경영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뉴욕증시 상장(1994)
그 가운데서도 포철은 외국인 주식취득 허용과 국내 기업 가운데 최초로 뉴욕증시에 상장하는 등 개혁적이고 공격적인 경영을 시도한다.

1992년 10월 13일 포항제철은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외국인의 주식취득을 허용하는 정관개정안을 의결했다

또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1993년 4월 1일 ‘신포스코 창조’를 선포하고 3대과 업으로 부조리추방, 권위주의타파, 경영구조혁신을 내걸었다. 이와 관련 9월 1일부터는 직위별 업무 수행범위와 업무중요도를 고려하여 책임과 권한을 하향 조정했다.

포항제철 직원의 상징이던 ‘황색제복’을 벗게 된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1993년 10월 1일부터는 출퇴근복을 자율화함에 따라 창립 이래 회사의 상징제복처럼 여겨졌던 황색 근무복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복장 자율화를 통해 획일적 조직풍토를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조직풍토로 전환하고자 했다.

주요 창업 1세대 임원들이 퇴진한 1993년부터는 포항제철이라는 사명을 변경하려는 시도도 본격화됐다.

당시 회사 측은 제철소가 포항과 광양으로 구분돼있는 현실에서 광양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문제가 커 1993년 연말에 제작되는 회사 달력과 근무 수첩에 포스코를 사용하고 1994년 3월 정기주총에서 동의를 받을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포항과 광양의 시민과 사회단체가 강력히 반발하자 이 방침을 일단 미루게 된다.

이 같은 소용돌이와 위기 속에서도 포철은 창업세대가 이룩한 양적인 성장의 기반 위에서 질적인 성장을 성취하며 경영혁신을 지속한 결과, 1997년 말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와 세계철강업체의 구조조정과정을 슬기롭게 헤쳐나오면서 규모와 경쟁력 면에서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박기환 당시시장으로부터 포항시 1호 명예시민증을 받는 박태준 회장(1997)
명예포항시민 1호 박태준…낭인생활 마치고 정계복귀의 발판

1997년 2월 포항시민회관에서 당시 박기환 시장으로부터 제1호 포항명예시민증을 받은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은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다.

1993년 3월 정치적 유랑 길에 올라 4년 동안 미국과 일본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한 회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태준 회장에 있어서 ‘포항’은 고향 이상의 남다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7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 사령탑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기 훨씬 전부터 포항과 인연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장교였던 박태준은 형산강 전투로 포항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 전투에서 그의 사촌 형이 포탄 사고로 숨져 형산강에 뼈를 묻었다. 재일동포로 와세다대 대학원에 다니던 사촌 형은 전쟁이 터진 조국으로 건너와 지원 입대해 병기 장교로 근무 중이었다.

포항명예시민증을 받아들자 그는 온갖 회한과 추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원래 김영삼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절대 귀국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그는 명예시민증을 받아들고 큰 결심을 하고 귀국시 기를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명예시민증을 받은 지 2개월 후 1997년 4월에 정계복귀를 선언하여 같은 해 7월24일에 실시된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 무소속으로 당선된다. 11월에는 JP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후 당 총재로 추대되어 김대중과의 김종필간의 연합(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제32대 국무총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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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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