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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72. 여주 강월헌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6월15일 17시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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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불로 불린 선승 누운 자리 '강 구경 달구경 극락이로세'

▲ 강월헌과 신륵사 삼층석탑.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다비장소이며 삼층석탑은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이다.
여강은 경기도 여주시를 관통하는 강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흘러나오는 남한강이 양평과 인접한 금사면을 빠져나갈 때까지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며 흐른다. 여강은 여주를 곡창지대로 만들고 풍부한 물산을 선사했다. 쌀 맛이 뛰어나 왕은 여주나 이천에서 나는 쌀만 먹었다. 아름다운 풍광 덕에 수많은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는데 사가정 서거정 같은 이는 ‘여주팔영(麗州八詠)’을, 목은 이색은 ‘금사팔영(金沙八詠)’을 지어 조선 선비들의 시심을 자극했다.

봉미산은 해발 856m로 용문산(1,157m)의 북쪽 능선과도 이어져 있다. 말 그대로 봉황의 꼬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봉황의 꼬리 끝에 신륵사가 있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여강을 굽어보고 있다. 절 안에는 조선시대 조포나루터 기념비가 있다. 강과 맞붙어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경승이었다. 조선초 문인인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앍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말했다. 서거정은 ‘여주팔영’에서 ‘벽사(甓寺)’로 소개하고 있다. 신륵사에는 벽돌로 만든 다층석탑이 있는 데 그래서 벽사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의 원찰로 삼았기 때문에 ‘보은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월헌편액. 나옹화상의 호를 따 정자이름을 지었다. 와도 온 곳이 없으니 달그림자가 천강에 비친 것과 같다라는 뜻이다.
신륵사 절 이름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신기한 미륵이 신기한 굴레(勒)로 용마를 다스렸다’는 데서 비롯됐다, 여강은 물길이 사나워 곧잘 범람했다. 큰비가 오면 강물은 모든 것을 쓸어갔다. 거센 물결은 ‘용마(龍馬)’라고 했다. “미륵이, 또는 혜근(나옹화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설과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다.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는 사찰,신륵사는 거센 물길을 잡기 위해 창건됐다는 것이다.

강월헌은 봉미산 끝자락과 여강의 조포나루가 맞닿는 곳에 세워져있다.
긴 강물은 흰 비단 폭을 쏟는 듯하고 長江瀉疋練
한 오솔길은 강가를 따라서 났는데 一徑緣江湍
내가 예전에 벽사를 찾아가 보니 我昔訪甓寺
지경이 깨끗해 속세 같지 않았네 界淨非人間
보제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는데 燒香普濟眞
오랜 세월에 구름은 장 한가롭구나 歲月雲長閑
백련사를 결성하기도 전에 未結白蓮社
먼저 영취산에 당도하였네 先到靈鷲山
우리 이 목은 노인이 생각난다 懷我李牧老
옛 비갈에 이끼가 얼룩졌구려 古碣苔斑斑

- 서거정의 ‘여강팔영’ 중 ‘벽사’

여주신륵사삼층석탑.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에 세워졌다.
신륵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이다. 나옹화상이 신륵사에 입적하게 된 이유는 요즘으로 말하면 아이돌 그룹 만큼 높은 인기 때문이다. 나옹은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왕사로 추대됐다가 밀성군으로 내쳐졌는데 그때 나옹이 양주 회암사에서 문수회를 베풀었다. 중앙과 지방의 남녀 노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구름 같이 몰려 포백과 과실 떡을 보시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는 우왕과 우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에게 위협이 됐다. 과도한 토목공사라며 나옹을 탄핵했다. 우왕은 밀양 영원사로 내쳤다. 쫓겨나는 나옹을 보면서 백성들이 통곡했다. 나옹은 길에서 병을 얻었다. 한강에 이르러자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레동안 배를 타고 신륵사에 도착했으나 열반했다. 세속 나이 57세였다.

강월헌 앞 여강은 관광지로 조성돼 각종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신륵사 끝, 여강과 맞닿은 곳에 강월헌이 있다. 강월헌은 나옹의 다비 장소에 세워졌다. 나옹의 호는 강월헌이다. 나옹은 죽으면서 ‘와도 온 곳이 없으니 달 그림자가 천강에 비친 것과 같고 가도 가는 곳이 없으니 맑은 하늘의 모습이 찰나에 바뀌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나옹에게서 빚을 졌을지 모를 일이다. 달은 부처이고 강은 중생이다. 나옹의 문도들이 다비 장소에 정자를 세우고 나옹의 호를 따 강월헌이라고 정자이름을 붙였다. 스님을 기념하여 정자를 짓는 일이란 흔치 않다. 본래의 누각은 나옹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 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6각형으로 정자를 다시 지었다.

강월헌 뒤에 서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
강월헌은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졌는데 이 암반을 동대라고 한다. 동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절 안에는 조포나루터가 있다.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 나루와 함께 남한강의 교통요충지였다. 유람을 떠난 사대부들은 조포나루에 배를 대고 동대에 오르거나 동대에 배를 바로 대고 강월헌에 오르기도 했다. 달밤에 동대 올라 여강에 비친 달을 보며 시를 읊으며 풍유를 즐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이색이 시를 썼고 권근 역시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식 김창협 정두경외에도 다산 정약용도 동대에 올라와 시를 썼다.

밤에 홀로 동대 탑에 올라 獨夜東臺塔
오사모 쓰고 멀리보며 서 있노라니 烏紗立逈然
무심한 소나무에 바람이 속삭이듯 불고 松虛風淅淅
강이 고요하여 달빛 유난히 밝네 江靜月娟娟
남은 길 무슨 별수 있다던가 末路無長策
뜬 인생 이미 늘그막인걸 浮生已晩年
조각배 여기 댄 것은 扁舟有歇泊
구름 연기 좋아서가 아니라네 不是愛雲煙

- 정약용의 시 ‘밤에 배를 대고 동대에 올라’

나옹화상이 600년전에 세웠다는 은행나무
나옹이 죽자 이색은 신륵사 사리 석종에 나옹에 대한 글을 쓴다. “강월헌은 보제(나옹)가 머물던 곳인데, 그의 몸은 이미 불에 타 없어졌다. 그러나 강물과 달빛은 예전과 같다. 지금 신륵사는 장강에 임해있고 석종은 높이 솟아있다. 달이 뜨면 그 그림자가 강에 기울어져 잠기게 되고 하늘빛과 물색, 등불과 향불 연기의 그림자가 그 속에서 뒤섞여 살라지리니 강월헌은 몇 천 년이 지나더라도 보제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은 것이다. ‘이색, 여강현 신륵사 보제 사리석종기’ 중에서 강월헌에서 이색과 나옹의 인연을 생각한다. 나옹은 1320년 영덕군 창수면 까치소에서 태어났고 이색은 8년 뒤인 1328년 영덕 영해에서 태어났다. 이색의 외가가 영해였던 것이다. 이색은 외가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는데 어릴 적 영해에서 자라던 추억을 시를 남겼다.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과 나옹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다.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에 ‘나옹정’이라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곡과 나옹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일대의 산수를 사랑해 자주 왕래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나옹과 이색은 원나라 유학을 다녀오는가 하면 공민왕과의 돈독한 친분을 가지며 고려시대의 엘리트로 촉망 받았으나 생전에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이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이색은 나옹을 찾지 않았다. 입적했을 때도 왕명에 따라 사리석종기를 썼을 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랐던 것이다. 불가와 유가는 확연히 다른 길이었다.

나옹은 우왕과 집권세력의 견제로 먼 길을 떠나다 병을 얻어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옹의 사리석종기를 쓴 이색은 강월헌에서 멀지 않은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옹이 죽은 지 20년 뒤이다. 태어난 곳도 영덕이고 죽은 곳도 여주 여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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