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만난 죽변항은 생동감이 넘쳤다. 고깃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쉴 새 없이 들어왔고 덩달아 갈매기도 바쁘게 끼룩댔다. 어항을 떠도는 비릿한 공기조차도 싱싱하게 느껴진다. 날것의 냄새들은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고 방금 도착한 어선에서 내린 대게로 어판장은 금세 풍성해졌다. 선주별로 잡은 게를 진열하기 시작했다. 허연 배를 위로해서 나란히 줄 세운 뒤 열 마리째는 등을 보이게 진열한다. 이유는 빠른 계산을 위해서다. 뒤집힌 게들이 집게발로 허공을 긁어댄다. 이렇게 해놓는 이유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똑바로 해 놓으면...
때늦은 추위에 옷깃을 세우며 왕피천이 흐르는 수산교를 내려선다. 이번 여행지에서는 또 어떤 풍경과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걸음보다 앞서 가는 마음 앞에 횃불을 든 조형물이 객을 반긴다. 여기는 2005년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의 주행사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단장해 놓은 곳이다. 문을 들어서자 아름드리나무가 공원을 지붕처럼 덮고 있다. 붉은빛 감도는 수피를 입고 하늘 향해 곧게 뻗어나간 나무. 늠름한 기상에 숭고미마저 드는 이 나무는 울진이 자랑하는 금강송이다. 강과 바다가 만든 20여 만 평의 대지 위에 유전자 보호림...
절기상 봄이 시작되는 입춘(立春)에 도보 여행을 했다. 바람이 매섭다. 입춘 추위는 꿔서도 한다더니 장독 여러 개 깨지겠다. 그 기세에 놀라 모두 따뜻한 집 안에 숨어 들었나보다. 동네엔 꼬리 치며 따라붙는 강아지 한 마리 없다. 그런데도 하늘은 예쁘다. 굽이굽이 몰려와 해안가에 뽀얀 메밀꽃을 넘치도록 풀어놓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파도는, 도도한 성깔이 매력이다. 기성항이 있는 작은 마을은 조용하고 소박하다. 머리를 공손히 낮춘 집들은 바다와 얼굴을 마주 보며 햇빛 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동으로 ...
요란한 확성기 소리에 잠이 깼다. 어촌계장님이신가? 지레짐작을 해 본다. 밖은 사이렌 소리, 엔진 소리, 사람들 발소리로 떠들썩하다.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해가 말갛게 얼굴을 내민 포구로 나간다. 일렬횡대로 줄을 서 있는 포구에 고기잡이배들, 부둣가에는 이제 막 내린 해산물을 사려는 사람들과 팔려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 올랐다. 후포항의 뜨거운 기운을 받으며 북쪽 해안 길로 들어선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동내 주민쉼터도 백사장도 조용하다. 좌측 산 밑에 평해 광업소 사택이 보인다. 머리 위를 지나 동해...
겨울비가 내린다. 이런 날이 운치는 있지만 도보 여행엔 최악이다. 무엇보다 손이 자유롭지 않다. 목에 건 카메라는 무겁고 우산 때문에 시야는 가린다. 바다는 하얀 막이라도 쳐진 듯 희끄무레하다. 고래불 해수욕장은 병곡면 6개 마을을 배경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진 모래사장은 뜨거웠던 여름날을 추억하며 꿈꾸는 여인처럼 누워 있다. 대형주차장 앞 고래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듯 역동적인 조형물은 인간과 자연은 하나며 고래불의 바람과 물, 태양 등은 모두 채움과 비움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
죽도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섬이었다 한다. 섬이 축산천과 동해안 연안류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산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섬이 산이 될 수 있을까. 죽도산을 수문장처럼 어귀에 두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축산항이다. 영덕의 대표적인 어항, 대게 위판장이 열리는 전국 5개항 중 한 곳. 와우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대소산이 서풍을, 죽도산이 남풍을 막아주는 피항지로도 유명한 곳, 축산항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와우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다. 왼쪽에는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금줄이 노거수 생가지에 걸려있고 오른 쪽에는 ...
어제는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동해의 밤과 낮 얼굴을 모두 보고 싶어서다. 동트기 전에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나갔다. 푸른 바다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너였구나, 밤새 귓속을 간지럽히며 찰그랑거린 게.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일출을 기다렸다. 해맞이 공원에서 맞이한 새벽, 묘한 설렘.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붉은 빛, 바다가 깨어난다. 해맞이공원 돌비석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넉넉하고 깊다. 바람, 갈매기, 파도,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 말소리가 살아있음을, 절대음감을 지닌 것에 대한 감사...
강구항은 아직 잠에 들어 있고 산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동굴처럼 캄캄하다. 손전등을 가져오길 잘했다. 머리 위로 물음표 모양의 북두칠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새벽 쌀쌀한 공기에 두 귀가 시리기는 하지만 얼굴에 와 닿는 감촉은 더없이 상쾌하다. 전등 불빛을 앞세우고 산속으로 들어서니 나뭇잎들 사이로 희부옇게 새벽이 내려앉고 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숲 냄새에 취해 본다. 한 굽이 돌아서자 오른쪽으로 암청색 바다가 보인다.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띠를 두른 운무가 켜켜이 차오르고 있다. 해가 뜨려나 보다.가파른 나무계단...
동해안 7번 국도에서 만나는 어항은 개별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구계항 역시 주변 경관이 수려하기로 소문났다. 구계는 마을 앞 바위의 모양이 새우가 물에 떠 있는 것 같아 하부라 불렀고 이후 조금씩 변화하여 구배, 구계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에다 깊은 계곡이 있어 구계라는 설도 있다. 이곳 바다에서는 홍게와 가자미가 많이 잡히고 대게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경부터 5,6월까지가 시즌이다.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만나온 바다는 대부분 잔잔했다. 온순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져 갯바위나 ...
화진해수욕장을 뒤로하고 국도변으로 올라선다. 씽씽 내달리는 차들의 속도감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갓길로 바짝 붙어 선다. 트레킹 코스에서 피하고 싶은 곳이 찻길이다. 특히 국도는 교통량이 많아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다행이다. 바로 저 앞에 해안으로 들어서는 표지판이 보인다. 백공작이라고 불리는 미국쑥부쟁이가 하얗게 피어 발목을 덮는다. 내 딛는 걸음마다 깊고 그윽한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파도 소리를 길벗 삼아 가파른 계단을 내려선다. 왼쪽으로는 해송 숲을,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 돌아나...
여름과 가을의 경계, 바다는 풍파 없는 삶처럼 잔잔하고 햇볕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따스하다. 들판의 벼는 노랗게 익었고 나뭇잎은 가을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바다와 함께 항상 흥한다는 의미인 흥해에서 처음으로 만난 건 오도리 간이해수욕장이다.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바다엔 여름의 꽁무니를 붙잡고 싶은 사람들이 모래사장에 햇볕처럼 모여 있고 동화 속 캐릭터들이 뛰어나와 신나게 춤출 것 같은 고래 카페 앞에는 나들이 온 가족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곳 해변은 전망 좋고 깔끔한 펜션이 많아 취향에...
아직은 해가 뜨기 전. 죽천교에 내려서니 하늘도 땅도 벌겋다. 오른쪽으로 바다, 작은 솔밭을 끼고 빠른 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해상크레인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까이는 잠에서 깨어난 갈매기 떼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밤과 낮이 몸을 바꾸는 순간이다. 해다. 붉은 해가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죽천길에서 일출을 보게 되다니, 눈이 부시다. 어둠에 묻혀있던 길이 훤하게 드러났다. 골목길에 세워놓은 스핑보드가 마을의 어떤 상징물처럼 다가온다. 바닷가 횟집들이 줄을 서있고, 해파랑가게를 겸한 마을회관 옥상 위에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 우리나라 날씨도 우기로 접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포스코 역사 박물관 앞에 선다. 포항 하면 포스코를 먼저 떠올리는 만큼 전시관을 놓칠 수 없다. 전시관 내 양옆 벽면에는 국내 최초로 고로 방식으로 ‘쇳물’을 생산한 과정과 철강 역사의 변화를 연도 별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곳부터 관람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가난의 굴레를 벗고 잘 사는 나라를 이루겠다는 꿈을 가진 ‘제철보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금껏 해변을 걸어온 것과 달리 이번 코스는 포항 시내를 도로변 따라 줄곧 걸으면 된다....
흥환보건소 앞이다. 어느새 푹푹 찌던 여름은 한 풀 꺾이고 시원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다. 흥환마트 문간에 해파랑길 스탬프 찍는 곳이 보인다.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조여 매고 16코스 시작점을 알리는 도장을 찍는다. 해파랑길 15코스와 16코스가 겹쳐지고 있다. 흥환교를 지나 바로 오른쪽 길, 금오산으로 가는 방향이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흥건하다. 산골 마을 집집마다 축축 늘어진 감나무 가지가 담을 넘고, 개울가 풀숲에서 가을 풀벌레 소리가 청아하다. 누가 벌을 치는지 밭머리에는 벌통들이 나란히 줄을 서 있다. 해파...
호랑이 꼬리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장막 같은 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이 바다위에 은빛 가루를 뿌려 눈이 부신다.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김정호는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이라는 확신이 서자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상생의 손 앞에 잠시 서 본다. “어, 손이다. 엄마. 바다에서 거인 손이 자라고 있어.” 가족이랑 피서를 온 서너 살짜리 남자아이가 손가락으로 상생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의 기발한 표현에 웃음이 터졌다. 바다에는 오른손이, 육지에는 왼손이...
후덥지근한 날씨다. 비라도 오려나. 후끈 달아오른 포장도로 열기를 받으며 구룡포 시가지를 빠져나가자 다시 해안도로다. 바다를 앞에 둔 고만고만한 민박집들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피서객 맞을 준비로 바쁘다. 구룡포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돌기둥에 ‘새골’이란 글씨가 또렷하다. ‘새골’은 옛 지명이고, 지금은 크게 번창시킨다는 뜻의 대신리(大新里)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하루에 일만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다는 반달형의 구룡포해수욕장 백사장이다. 발밑에 모래가 벨벳 융단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한더위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
하늘이 만삭의 임산부처럼 무거운 배를 내밀고 있다. 금방이라도 출산할 것 같다. 언제 굵은 빗줄기를 쏟아낼지 몰라 비옷과 우산까지 꼼꼼하게 챙긴 뒤 모포 어항에 섰다. 고깃배가 줄지어 선 포구는 고요하다. 비가 좀 와야 할 낀데. 사람들의 근심을 들으며 마을 어귀를 돌아 바닷길로 접어든다. C자형 해변이 친화력 있는 여인처럼 다가선다. 그 가운데 서 있는 기암괴석.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여인 같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여 이런저런 이름이 다양하게 붙었겠지만 내 눈에는 영락없는 망부석이다. 등에 업힌 ...
양포항을 뒤에 두고 장기면 신창리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길가로 비켜 앉은 좌판 위에 소라, 멍게, 해삼이 때도 아닌데 군침을 돌게 한다. 해변 전봇대에 빨간 해파랑길 리본이 보인다. 낯선 곳에서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닷가 축양장, 건장한 뱃사람들이 트럭을 대놓고 바쁘다. 북쪽으로 몇 발 뗐을까. 사라 태풍에 밀려왔다는 거대한 바위가 동해를 앞에 두고 멈칫 서 있다. 이름이 부챗살 바위라는데 이름과 그 난리와는 무관한 듯하다. 여기가 신창리어촌벽화마을이다. 이젠 어딜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
바다는 안개 속에 몸을 깊숙이 숨기고 있다.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해파랑 길을 여러 번 걸었지만 이렇게 해무가 잔뜩 낀 날은 처음이다. 넓디넓은 바다를 뒤덮은 안개라니. 뜻밖의 선물에 잠시 넋을 잃는다. 누군가는 운치 있는 바다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는 손잡이가 긴 갈퀴를 들고 미역을 건져 올리고 있다. 여행객에겐 낭만적인 곳이지만 이곳 주민에겐 노동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갈퀴로 미역을 건져 올리던 아낙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 놓인 돌다리는...
문득, 뒤돌아본 풍경 앞에서 나는 쉬 발길을 떼지 못한다. 감은사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감포등대가 가는 길 배웅이라도 나온 듯, 해무 속에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다. 오래된 옛집 동네 어귀에 선 엄마의 모습이 저랬다. 아쉬움에 머뭇거리며 감포 척사길로 접어든다. 구붓한 해변 길을 돌아나가니 낯선 풍경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우듯 긴 장대를 든 사람들이 자연산 미역을 따고 있다. 긴장의 끈이 팽팽한 진풍경 앞에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본다. 아주머니는 "요즘 사람들은 옛날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