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 동산의료원 남쪽 입구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이국적인 정원과 건물을 만날 수 있다.1906년부터 1910년까지 지어진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숙소들이며 거주하던 선교사들의 이름이 붙어졌다.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 받는 것은 물론 1999년 박물관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동산의료원은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스윗스 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블레어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만들었다.△생소한 근대 서양식 건물의 등장, 당시 선교사들의 주거·생활 양식 그대로
대구 중구 남성로와 동성로 2·3가 일대에 자리 잡은 ‘약전골목’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한약방이나 약업사, 한의원, 인삼사, 약차집 등 수백 개의 관련 업소가 들어서면서 ‘약령시’(藥令市)라고도 불린다. 규모가 커지면서 붙은 명칭이다.약전골목 또는 약령시는 쌉쌀한 한약 향이 무려 350년이 넘도록 끊이지 않은 곳으로, 오랜 역사를 보유한 장소인 만큼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이곳에 숨어 있다. △‘대동법’이 약령시 만들었다?대구에서 처음 약령시가 열린 곳은 현재 위치의 약전골목이 아니다. 1658
△ 대구 영남대로 -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반드시 통과.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주요 도로는 9개였다.그중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 영남대로다.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영남대로는 부산에서 시작해 대구-문경새재-충주-용인을 거쳐 서울로 도착하게 된다.약 900리 길, 380㎞에 이르며 걸어서 갈 경우 14일이 걸린다.대구는 영남대로의 한 구간으로 옛 대구읍성 앞밖걸이 대표적이다. 앞밖걸 주변은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이 만나 자유시장이 번창했다고 전해진다.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
△ 단출한 애국지사의 터전. 대구 중구 계산동 근대문화골목.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 옆에는 민족 저항 시인 이상화 선생의 고택이 있고,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는 애국지사 서상돈 고택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랏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인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이고,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초등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위해 찾기도 하고, 고풍스러운 ‘셀카’를 찍기 위한 2030 세
△3·8 만세운동 주도한 교남YMCA.“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떻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3·8만세운동을 주도한 교남기독교청년회(교남YMCA) 회장 이만집 목사가 일제의 심문과정에서 내뱉은 말이다.1919년 2월 15일 대구의 지도자층은 3·1만세운동 정보를 최초로 접했다.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교남YMCA 창립지도자 백남채를 만나 대구에서도 3월 1일 봉기할 것을 전달하면서다.3월 1일 경성과 평양, 원산, 선천 등에서 만세운동이 개시됐고, 3월 4일 세브란스 의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중략)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시인 이상화의 가슴은 나라를 잃은 망국의 한(恨)으로 가득 차 늘 답답했다. 차라리 만주에서 일제와 맞서는 그의 형 이상정이 부러웠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그는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가혹한 일제의 탄압은 그를 좌절시켰다.갑갑함을 털어내기 위해 찾은 수성들. 거칠 것 없이 드넓
△가톨릭의 성지 ‘계산성당’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도 유명하다. 대구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이자 경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다. 100년에 달하는 역사적·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현재 계산성당 건물에서 첫 미사를 지낸 것은 1902년 12월 3일로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19년 전 이야기다.하지만 실제 본당이 들어선 역사는 이보다 3년 앞선다. 1899년 당시 순수한 한식(韓式)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
대구(大邱)는 대구(大丘), 달구(達丘), 달구벌(達句伐)로 불리는 등 지명 변천사만큼 상징해온 별칭이 많았다. 특히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이야기의 도시이기도 하다.근대문화유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도심 곳곳에 숨 쉬고 있고, 도심 외곽은 신숭겸 장군 유적지 등 역사문화 유적이 포위하듯 늘어서 있다. 긴 역사의 약령시 도시, 6·25 때의 피란도시, 1950년대 후반의 야당 도시, 그 이후의 여당 도시, 보수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교육도시, 문화도시, 미인 도시로도 불렸고 특화산업에 빗대어 능금 도시, 섬유 도시로도 불렸다.대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