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풍수썰전’ 기고에서 경주 양동마을 풍수에 대해 다룬 적 있다. 그때는 양동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풍수적 특성을 설명했다. 이에 이번 회는 월성 손씨 대종가이자 마을의 풍수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서백당(書百堂)을 알아본다.‘손동만 가옥’, ‘송첨 고택’, ‘월성 손씨 대종가’ 등 여러 이름이 붙지만, 그래도 귀에 익숙한 이름은 서백당이다. 마을의 손씨 입향조인 손소(孫昭·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양동 처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으로 전한다.서백당의 건축학적 의의는 우리나라의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97년 외환 위기로 힘들었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었던 선수다. 그의 생가가 충남 공주시 산성찬호길 19에 있다. 몇 년 전, 공주시는 그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주변 골목길도 박찬호 골목길로 정비함으로써 지역의 관광 명소로의 탈바꿈을 꾀했다.이에 이번 회는 풍수의 시선에서 생가가 박찬호 선수의 인생행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박찬호 생가는 공산성 아래 언덕에 있다. 오래전 마을이 들어서기 전에는 제법 큰 산줄기가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형상이었다
부동산 법률은 우리 국토의 모든 땅에 대해 각각의 용도를 분류해 놓았다. 도시·관리·농림·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구분하고, 도시 지역은 다시 주거·상업·공업·녹지지역으로 세분하고 있다. 개인 사유지라도 무분별한 개발과 훼손을 막아 국토를 계획적으로 개발하고 공공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다.이때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문제는 인간이 주체인 법률에서 정작 인간이 소외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각종 토지 관련 개발 사업에서 가장 큰 화두는 역시 ‘사업성(돈)’이다. 물론 ‘인간’에 대한 고려가 한발씩 보태지고 있지만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가슴 아픈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 한 말이다. 몇 년 전 한 신문사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조사대상 75%가 월 소득 200만원이 채 안 되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마치 증명이라도 되듯 현실이 되어 있었다.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사회적 자양분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했다.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선대의 희생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선대들보다 더 힘든 삶을 꾸려
지난주 여야는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풍수가의 개입 여부를 놓고 상호 공방전을 펼쳤다. 덩달아 ‘풍수(風水)’의 용어 또한 며칠간 각종 신문이나 미디어에서 뜨거운 감자로 회자되었다.풍수가의 일인으로서 풍수가 세인의 관심을 받는 것이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큼 ‘풍수는 미신’이라는 오해의 골 또한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물론 그 오해의 주된 이유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풍수가들 잘못이다. 풍수를 대중에게 올바르게 알리지 않았거나, 풍수를 대중을 위해 올바르게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鳳停寺)는 영주 부석사와 함께 우리나라 화엄종을 대표하는 고찰이다. 봉정사의 창건은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682년)과 능인대덕(能仁大德) 창건설(672년)이 있다. 그중 능인대덕 창건설이 우세하다.두 창건설에는 공통적으로 ‘봉황’이 등장한다.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더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앉았고,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해 ‘봉황이 머무른 절(봉정사)’로 이름 붙였다는 내용이다.그런데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과 능인은 스승과 직계 제자 사이였다. 또 부석사와 봉정사는 창건 시기가 비슷하고 둘 다 화엄종 전
동양 문화권에서 사찰은 흔한 종교 건물이다. 그러나 흔하다 하더라도 다 똑같지는 않고 나라별 자연지형이나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인도나 중국은 석굴사원이 많고, 일본은 사찰정원이 발달했다.우리 국토는 산이 없는 곳이 없다. 자연히 사찰 또한 ‘산지 사찰(山寺)’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사찰 7곳이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의 이름도 ‘산사(Sansa)’였다. 그중의 한곳이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다.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은 우리나라 전통사찰 창건에 등장하는 인물로 독보적이다. 전국에서 그
옛말에 ‘열 정승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 대제학은 최고로 영예로운 벼슬이자, 그만큼 선비로서 도달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래서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연안이씨, 달성서씨, 그리고 광산김씨는 흔히 조선조 3대 명문가로 불린다. 세 가문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한 명 배출도 힘들다는 대제학을 무려 6~7명씩을 배출했다. 실로 명문가로 불릴만하다.그중 광산(光山)김씨는 조선 중기 사계(沙溪) 김장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 부자(父子)가 문묘에 동
퇴계가 태어나고 자란 퇴계 태실(노송정 종택)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다. 이곳을 자리 잡은 사람은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老松亭 李繼陽, 1424~1488)이다. 퇴계의 『사적(事蹟)』에는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공이 봉화현 교도가 되어 봉화로 가던 도중 온계를 지나다 산천이 아름다워 살펴보았다. 공이 신라 고개에서 한 중을 만나 온계 풍수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되었다. 중의 생각이 자기와 같음을 기뻐하여 중을 데리고 다시 온계로 돌아와 주위를 두루 살펴봤다. 공이 어느 한 집터를 가리키니 중이 “이곳에 자
안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많은 명사(名士)와 현철(賢哲)을 배출시킨 인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그 중심에 퇴계 이황이 있다. 학문과 삶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실천하는 ‘선비’의 삶으로 일관한 그의 인생은 세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그런 퇴계의 묘소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도산서원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퇴계 종택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퇴계 묘소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넓은 주차장이 있다.특별한 점은 여느 유명인 묘
남연군 이구(李球),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다. 그의 묘소가 충남 예산 땅에 있다.대원군 이하응은 풍수를 신봉했다.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란 말을 믿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묘를 이곳으로 옮긴다. 이를 위해 이곳에 있던 가야사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장 7년 후에 차남(명복)이 태어났고,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고종)에 오르게 된다.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풍수 스토리가 된다. 그래서 남연군묘는 풍수가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어 왔다. 아니 그 범위를 넘어선다. 한 개
풍수에서 산은 귀(貴)를 의미하고 물은 부(富)를 의미한다. 귀인이 배출된 터에 산이 좋지 않은 곳이 드물고, 전국의 부자 터에 물이 좋지 않은 곳도 드물다. 단 귀인이나 부자를 배출한 바탕은 생가터와 조상 묏자리로 양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 다 좋은 경우는 잘 없다는 말이다.물론 예외도 있다. 수십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가문이다. 윤보선 가문은 생가와 선영 둘 다 풍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윤보선 본인도 가문의 번성이 풍수 때문임을 인정하는지, 가끔 선산에 들러 풀 뽑기를 즐겼다고 한다. 급기야
정치와 풍수의 결탁은 생각 외로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 체계화된 이론으로 한반도 땅에 들어온 후, 풍수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숱한 부침을 겪으면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그 속에서 풍수는 작게는 조상 묏자리나 집터를 잡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왕릉과 사찰, 도읍지 선정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용되었다. 이때 풍수는 단지 그 본연의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치적 수단이나 명분과 손잡은 경우도 많았다.정치와 풍수, 비단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하회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풍수적 경관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값진 곳이다. 그래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쌍두마차로 불린다.양동마을은 주요 가옥들이 산 능선을 타고 있어 산과 연관성이 크다면, 하회마을은 물이 마을 특성을 규정짓는다. 낙동강의 너른 물줄기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 전체를 동쪽과 남쪽, 서쪽 세 방향으로 감싸고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물돌이(하회, 河回)’다.당연히 풍수 호사가들 사이에 약방의 감초격으로 거론되어 왔다.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어 산태극수태
지난 회는 경남 진주 승산마을의 풍수에서, 승산마을의 땅기운 누설을 막아주는 천연 및 인공 지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러 단계의 자물쇠 장치들의 도움으로 생가마을은 비로소 혈을 맺기 위한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이번 회는 실제로 혈을 맺는 주인공 산줄기가 지나가는 실개천 서쪽의 생가마을을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설명에 앞서, 두 가지를 당부 드린다. 첫째는 이번 회의 내용은 일반인에게 다소 어렵다. 그러나 승산마을을 풍수로 해석하는 이상 꼭 설명이 필요한 열쇠임에는 틀림없다. 둘째는 몇몇 생가에 대해 평
이번 회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명당 중 경남 진주 승산마을을 소개한다. 이곳은 LG·GS 등 국내 굴지의 그룹 창업주들의 생가가 밀집되어 있는 마을이다.마을은 양성(월성 손씨·여강 이씨) 씨족 마을인 경주 양동마을과 흡사하다.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가 수백 년 동안 터 잡고 살아온 양성 집성촌이다. 600여 년 전 김해 허씨가 먼저 자리 잡아 허씨 집성촌을 만들었다. 이후 300년 뒤에 능성 구씨를 사위로 맞으면서 허씨와 구씨가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일구어 왔다.승산마을이 부자 명당으로 알려진 것은 비단 근래의 일이 아니다. 조
사람의 행복 척도에 부귀(富貴)가 다는 아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부귀를 누리겠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둘 중 하나만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과거에는 귀(貴)가 선호되었다. 귀가 있으면 부(富)가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어두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틀리지는 않다.현대는 반대다. 귀가 있다고 해서 부가 따르는 경우는 잘 없다. 오히려 귀가 부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귀를 이용해 부를 쌓았는지 감시받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가 있으면 귀가 따르는 세상이다.
필자는 풍수학자다. 그래서 땅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점친다. 그러나 완벽한 것은 없다. 풍수 자체가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타도 아니며, 필자 스스로도 아직 만족할만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그래도 확신하는 것은, 풍수가 인생길에 힘을 실어줄 수도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때 풍수가는 주로 생가(양택)나 조상 묏자리(음택)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점친다. 물론 현재 거주하는 집도 중요한 고려 요소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제한사항이 많다.풍수가에 따라 생가와 묏자리의 중요도를 달리한다. 그중 필자는 생가와 조상 묏자리를 종합적으로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다. 조선 중기의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손이자, 김종인 전 대통령 경제수석의 조부이기도 하다.가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며 항일운동 관련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항일 운동가들의 변호를 자처했다. 해방 후 대법원장 재임 기간에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특히, 세상 사람이 다 부정에 빠진다 할지라도 법관만큼은 최후까지 정의를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법부 역
대전 대덕구의 본래 이름은 회덕(懷德)이었다.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大人懷德 小人懷土).’는 공자의 논어에서 인용했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 당시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붙인 이름이다. 여러모로 ‘대덕’보다는 ‘회덕’이라는 이름이 더 정감이 간다.그곳 송촌동에 동춘당(同春堂)이 있다. 동춘당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당 건축양식으로 인정받아 보물(제209호)로 지정됐다. 그만큼 대전이 가장 자랑할 만한 옛 건축물의 하나이다.동춘당은 조선 중기 학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