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나갔다가 내년도 탁상 달력을 받아왔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달력 소비가 점점 줄어 벽걸이 달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매년 느끼는 감정이지만 새 달력을 받아드는 기분은 다면적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제 며칠 남은 올해 달력과 새 달력을 나란히 세워 본다.1월 1일 문을 열고 들어선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365일 중 350여 일을 사용했다. 계획대로 실행한 것과 그렇지 못한 목록을 반추해 본다. 동시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이맘때는 항상 여러 마음이 교차한다. 하루하루를 디딤돌처럼 밟고 오늘까지 왔
몇 년 전부터 MBTI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 이전에는 혈액형에 관심이 많았다. 매체마다 혈액형에 따라 출연진들을 어떤 틀에 집어넣어 ‘소심, 활달, 자유롭다, 속을 알 수 없다, 개방적이다’라고 편 가르듯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친구 넷이서 밥을 먹고 있었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유롭고 돌발적인 AB형이 말도 없이 식당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호기심 많고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O형이 뒤쫓아 나갔다.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던 소심한 A형이 왜 저러느냐고, 혹시 A
지난 2일 생리의학상 발표를 시작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결정되었다. 다가오는 12월이면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이 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에 스웨덴 국왕이 직접 수여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평화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데 나눠서 시상하는 이유는 노벨이 죽고 난 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분리된 까닭이다.북유럽 여행 때 스웨덴 시청사에 들른 적이 있다. 쿵스홀맨섬 동쪽 끝에 자리한 이 건물은 건축가 라구나르 오스토베리가 설계하였는데 15년에 걸쳐 완공한 후 그는,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김주영 작가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작가는 어느 독자가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하더니 선생님은 어떻게 섹스 묘사를 그렇게나 사실적이고 실감 나게 잘 표현하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은 아랑곳없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섹스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졌으니 성공한 셈이다.”라고 예의 농담 섞인 어조로 또 한 번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덧붙여 선생님은 글에는 쓰는 이가 투영되어야 하며 자기
문단의 선배와 차 한 잔을 두고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토론 장소가 아니다 보니 흔히 그렇듯 정해진 주제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두서없이 오갔다. 그러다가 홍어 이야기가 나왔고 말머리는 곧장 ‘삭힘’에 모아졌다. 오랜 공직생활을 해온 선배는 나이가 든다는 건 숙성의 시간을 거쳐온 홍어처럼 제대로 발효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그 말의 뜻을 이해는 하였지만,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홍어를 제대로 삭히지 않으면 톡 쏘는 풍미를 느낄 수 없듯이 나이와 숙성은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반론에 선배는 그래서 삭힘의 시간이 더 필요하단 말을
달력 한 장 넘겼을 뿐인데, 기온이 확 달라졌다. 서둘러 여름옷과 가을옷의 위치를 바꾸었다. 낮 동안 반짝 더운 듯하지만, 그늘은 서늘하다. 이미 여름은 꼬리를 감아쥐고 저만치 멀어졌다. 오랜만에 공원을 걸었다. 바짝 마른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의 몸을 친다. 시작은 늘 끝 지점에 왔을 때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다.가을이 보름달처럼 꽉 차면 음미하고 생각할 일이 많아진다. 감정도 물들기 때문인지 10월은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어느 한때를 눈앞에 실어다 준다. 삶을 어떤 식으로도 해석할 수 없던 나이. 어쩌면 기억 따위를
한국이 늙어간다. 2040년이 지나면 일본을 제치고 가장 늙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작년 말 고령화율이 17.5%였단 기사를 보면서 미래를 잠깐 상상해 보았다. 우리 부모님은 각기 일흔두 살과 여든아홉까지 사셨다. 어머니는 노인성 질환 이외에 큰 질병 없이 아흔 가까이 사셨으니 장수한 셈이다.어머니를 닮았으면 나도 오래 살 확률이 높다.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오래 살게 되면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텐데 미래사회는 자녀의 부양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다 할 질병이 없던 어머니도 여든이 지나면서 가족의 돌봄이 필요했고
명품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알뜰하다. 커피, 음식값을 아껴 기어코 원하는 걸 손에 넣는다. 찜해 둔 걸 손에 넣었을 때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했다. 삶의 방향도 소비패턴도 그녀와 다른 나는, 몸이 명품이라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한때 나는 샤넬 향수에 빠져 지냈다. 향수계의 혁명을 일으켰던 샤넬 No. 5는 전 세계에서 30초에 한 병씩 팔려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이 “여성의 향기가 나는 여성의 향수”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세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에서 가이드가 특별히 소지품 관리를 당부할 때가 있다. 집을 나서면 마음이 느슨해지는지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팀의 일원이었던 어느 분이 피사의 사탑에서 젊고 예쁜 백인 여성의 손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걸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 여성은 쌕, 웃더니 손을 뺀 뒤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다행히 그분은 일찍 발견해서 도난당한 게 없었지만, 그보다 젊은 남자가 주머니를 털렸다. 사람이 몹시 붐볐던 터라 도난당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출발할 때쯤에야 지갑의 행
오전 9시에 헬스장에 간다. 스트레칭 후 러닝머신에 올라가 힘차게 걷는다. 땀을 쭉 빼고 나면 기분이 맑아지면서 개운하다. 그때부터 근력 운동을 1시간쯤 한다. 환절기에는 야외에서 유산소 운동을 한 뒤 실내로 와서 기구를 들지만,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는 아예 실내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탁구나 배드민턴, 등산이나 골프처럼 여럿이 할 수 있는 운동과 달리 헬스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정말 하기 싫은 날도 있지만, 일단 도착만 하면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이라 헬스장에 몸을 데려다 놓는 게 중요하다.운동이 끝나면 양쪽 어깨를 꼭 껴안아 주며
그가 출연한 영화는 빠짐없이 본다. 어떤 역할이든 완벽하게 인물 속에 녹아들어 물려받은 재능이라 여겼다. 스크린 속과 밖의 인물이 구분이 안 될 만큼 연기에 진정성이 있어 황정민이란 이름이 뜨면 신뢰가 간다. 그는 한 여자를 죽을 만큼 사랑하는 순정남, 악랄하고 잔인한 건달 역할도 소름 끼치게 소화한다.저 배우의 내부엔 끼가 선천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로드 무비』를 찍을 때는 서울역에서 일주일 동안 노숙인 생활을 하며 그 인물로 살아보려고 했고 『국제시장』을 찍을 때도 파고다 공원에서 노인들을 만나 시간을 보
무더위와 산발적인 소나기가 교차한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는 상큼한 일도 짜증스러울 수 있는데 아기를 상대로 한 살해, 유기, 불법 거래 사건이 작정한 듯 쏟아진다. 출생 미등록에 따른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국회는 ‘출생 통보제’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출생은 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한때 우리나라는 해외 입양 수출국 1위 기록을 차지했다. 지금도 여전히 송출국 순위권에서 제외된 건 아니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베이비 박스에 담긴 아기의 숫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 아기는 축복이다. 기쁨이고 행복이
요즘 ‘솔로 나라’ 방송을 즐겨 본다. 남녀 각 7명이 출연하여 공개적으로 자신의 짝을 찾는 프로인데 출연진 모두 개성적인 데다 자기감정에 솔직하다. 주 연령층이 30대지만 간혹 2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 나올 때도 있다. 그들이 방송에 나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배우자감을 만나고 싶어서다.한때 결혼정보 회사가 인기였다. 물론 지금도 꾸준히 찾는 사람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곳이 개인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곳이라면 솔로 나라는 공개적이다. 열린 공간에 나와서 ‘나 이런 사람이다’라며 당당하게 밝힌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왔고
나는 못 하는 게 참 많다, 그중 하나가 식물 기르기다. 봄이 익어 여름이 가까운데 우리 집 식물 중에는 기운을 못 차리는 애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내놓아도 아픈 기색이 역력하다. 물을 주어도 이파리가 갈색으로 변한다.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보여야 할 것 같다.관공서나 음식점, 카페에서 가끔 싱싱한 화초를 볼 때가 있다. 툭 던져둔 것 같은데 잘 자란다. 건강한 초록이 탐나서 안면이 있는 이에게 물었더니 그냥 때맞춰 물 주고 가끔 영양제 꽂아주어요, 라고 한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예고편에 끌려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예고편은 신상품 출시를 알리는 홍보와 같아서 구매자의 욕구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므로 편집이 대단히 중요한데 예상대로 밀도 높은 장면이 폭탄처럼 쏟아져, 구매와 결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라스트 버스」. 제목에서 이미 감성이 건드려졌다. 아흔을 넘은 노인이 주인공이다. 톡 쏘는 향신료나 칼칼한 맛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 플롯에다 구성은 사건이 일어난 순이다. 담백하고 순한데 맛은 깊다. 도입부는 주인공 폴이 아내와 사별한 뒤 그녀와 추억이 깃든 고향에 가기 위해 버스 여행을 시작하는 것에서 시작
유명 연예인 부부의 깻잎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본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가수 이무송, 노사연 부부가 식사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 노사연 씨의 여성 후배가 동석했다. 함께 식사하던 중 후배가 깻잎을 집었는데 잘 떼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걸 본 이무송 씨가 젓가락으로 깻잎을 눌러주었는데, 그 일로 노사연 씨가 화를 냈다고 한다.게스트와 네티즌의 반응은 엇갈렸다. 어째서 그게 부부 싸움으로 번질 일이냐는 쪽과 깻잎은 절대 눌러주면 안 된다는 이들의 주장이 맞섰다. 아이러니한 건 남성들은 도와줘도 괜찮다, 여성들은 기분이 나쁘다는
공원에 비둘기 떼처럼 노인들이 모여 앉았다. 봄이 되면서 말동무와 햇볕이 고픈 분들이 자주 모인다.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뽀글뽀글 파마에 알록달록 원색의 옷 색깔이 비슷하다.“왜 이제 와?” “어제는 왜 안 나왔어? 어디 아픈 줄 알았네.” “성당은 어제도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모일수록 안부 인사가 길어진다.“아이고. 저기 유모차 오네.”할머니 한 분이 소리치자 다른 분들은 목을 쭉 빼서 어디, 어디 하면서 살핀다. 쳐다보니 유모차에 몸을 의지한 채 걸어오는 할머니 한 분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보통인 주말, 하늘이 청명하다. 시간이 더 지나면 벚꽃이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아서 밖으로 나갔다. 3월이면 상춘객으로 북적이는 이곳. 벚나무가 만들어 낸 긴 터널. 마스크를 걷어낸 얼굴마다 꽃보다 환한 웃음이 걸렸다.대부분의 사물은 실제보다 무엇에 반영되었을 때 환상적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에 비친 하늘, 바람이 만들어 낸 물고랑은 왠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천변을 향해 휘어진 꽃가지와 어른, 아이, 그림자. 그 위로 쏟아지는 빛과 그림자의 오묘한 조화를 보고 있자니 모나리자의 미소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웃는
‘더 글로리’ 인기가 뜨겁다. 첫 회부터 흡입력 있게 시청했다. 작가와 연기자의 공이 큰 까닭도 있지만 폭력 장면이 사실적이고 악랄했다. 전반부가 공개된 후 2개월이 지나 후반부가 나왔는데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세계 6위에 단숨에 올라섰다. 드라마를 시청하며 피해자와 가해 학생들의 가정과 부모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드라마엔 크게 다섯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가해자인 연진 엄마는 무속신앙에 빠진 재력가이고 사라는 대형교회 목사 부모를 두었다. 반면 피해자인 소희와 선아, 주인공인 동은은 빈민층 가정에서 자랐다. 가해자인 연진
어두웠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반짝이듯 천장에서 빛이 흘러내렸다. 묘한 신비감에 심장이 조였다. 입을 다물고 발소리를 죽였다. 국보 78호와 83호를 만난 건 작년 8월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실 3층 단독 전시방에 1구씩 전시되어 있던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2층 상설 전시관으로 내려왔다.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전시된 곳은 ‘사유의 방’이다. 국보를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공간은 음소거를 한 듯 고요했다. 왁자지껄한 바깥과 다른 세상이다. 의도된 공간이 주는 품